Antoine Gron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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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3, 2016english·한국어·français

초조함§

Antoine Grondin

어떤 날은 힘들다.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삶을 남김없이 누리려고 애쓰는 것. 자의적이라고 느껴지는 삶의 목표를 갖는 것, 삶은 자의적이고, 따라서 어떤 삶의 목표든 자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명제로서 받아들이려 애쓰는 것이, 삶을 경험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삶을 경험하고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단지 그것이 좋게, 혹은 나쁘게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그 경험을 의미 있게 만든다.

삶은 무의미하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고 받아들이고 나면, 내게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주제가 하나 생긴다: 그것을 남김없이 누리는 것. 그리고 어려운 것은 전부 거기서부터 따라 나온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남김없이 누릴 수 있는가? 어떤 활동이 가장 많은 기쁨을 줄 것인가. 어떤 전략이 단기적인 기쁨 대신 장기적인 기쁨으로 이어질 것인가, 가능하면 둘을 섞어서!

내가 짐작하기로, 세속주의자로서의 삶은 신앙인의 삶보다 힘들다. 세속주의자들은 스스로 목적을 지어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삶의 무의미함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지만, 개의치 않고 그것을 경험하는 일을 즐기기로 선택할 때 이 불편한 진실을 무시하기로 한다.

나는 이것을 '위대한 위선 행위'라고 부르겠고, 이것이 낙관적인 세속주의자에게 필요한 일관성의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의적으로 몇몇 목적을 고르고, 실용적인 차원에서 그것들이 다른 목적보다 더 중요하다고 정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절대적인 의미에서(진정한 절대적 목적이라는 것이 있다면) 목적을 지니는 것들과 구별하기 위해, 위선적인 목적이라는 뜻에서 나는 그것들을 "하위선 목적"이라고 부르겠다.

지금 내 문제는, 하루하루의 실존적 불안, 곧 내게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고 하위선 목적이 없는 일에 낭비하고 있다는 걱정에 대처할 전략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하위선 목적이 있는 것들은 무엇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이루는 것이 가장 좋은가? 실존적 만족을 이루는 방법이 세 가지 있다고 가정해 보자:

  1. 하위선 목적이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이루거나, 그것들의 성취를 향해 나아간다.
  2.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스스로를 마취시켜 만족에 이른다.
  3. 종교적 믿음은 편리한 기성품 해답이므로, 그것을 따르는 것을 자신의 '위대한 위선 행위'로 택한다.

나는 첫 번째 방법이 좋지만, 셋 중 가장 어려운 방법인 것 같고, 그게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다. 어떤 날은 실존적으로 만족스럽다고 느끼고, 그런 날이면 이것이 도달할 수 있는 목표라는 희망이 생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나머지 날들도 있다. 이런 식으로 실존적으로 만족하려 애쓰는 것은 끊임없는 목표 달성을 요구하는 것 같고, 그건 지치는 일이다. 지치는 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고, 때로는 그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는 것이 둘 중 더 나쁜데,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적어도 이걸 적어 두기는 했다. 나는 허무주의, 실존적 허무주의, 실존적 위기, 실존주의, 그리고 세속적 영성에 관한 위키백과 문서를 읽으면서, 누군가 이 문제에 이름을 붙여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하루 종일 초조해할 것이다... 피곤해져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러고 나서 내일은 어제를 남김없이 누리지 못해 끔찍한 기분으로 깰 것이다.

타무닝 -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