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함
어떤 날은 힘들다.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삶을 남김없이 누리려고 한다. 삶의 목표는 있지만, 자의적으로 느껴진다. 삶 자체가 자의적이니, 어떤 삶의 목표든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하나의 명제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해서, 삶을 경험하는 일까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삶을 경험하고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그 경험을 의미 있게 만든다. 그냥 좋거나 나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삶은 무의미하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삶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 생긴다. 바로 삶을 남김없이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건 전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떻게 해야 남김없이 누릴 수 있을까? 어떤 활동이 가장 큰 기쁨을 줄까? 어떤 전략이 단기적인 기쁨이 아니라 장기적인 기쁨으로 이어질까? 이왕이면 둘 다 섞어서!
아무래도 종교 없이 사는 사람의 삶은 믿는 사람의 삶보다 힘든 것 같다. 종교 없이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목적을 지어내야 하고, 결국에는 삶의 무의미함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삶을 즐기기로 했다면, 그건 이 불편한 진실을 모른 척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대한 위선이라고 부르겠다. 종교 없이 사는 낙관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일관성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목적을 자의적으로 고르고, 현실적인 이유로 그 목적이 다른 목적보다 더 중요하다고 정해야만 하는 것 같다. 절대적인 의미의 목적(그런 진정한 절대적 목적이 정말 있다면 말이다)과 구분하기 위해, 나는 이런 목적을 "하위선(下僞善) 목적"이라고 부르겠다. 위선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 문제는 매일 찾아오는 실존적 불안에 대처할 전략을 찾는 것이다. 내게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걱정, 하위선 목적이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걱정 말이다. 하위선 목적이 있는 일이란 무엇이고, 그런 일을 어떻게 해내는 게 가장 좋을까? 실존적 만족에 이르는 방법이 세 가지 있다고 해 보자:
- 하위선 목적이 있는 일을 끊임없이 해내거나, 해내는 쪽으로 나아가기.
- 그 질문은 그만 생각하고, 감각을 무디게 해서 만족해 버리기.
- 종교를 자신의 위대한 위선으로 삼기. 편리하고, 이미 다 만들어진 해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첫 번째 방법에 끌리지만, 그중 가장 어려운 방법인 것 같고,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다. 어떤 날은 실존적으로 만족스럽고, 그런 날이면 실존적 만족에 정말 닿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긴다. 하지만 나머지 날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식으로 실존적 만족을 느끼려면 끊임없이 목표를 이뤄 내야 하는 것 같은데, 그건 지치는 일이다. 지치는 이유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고, 때로는 그냥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둘 중 더 나쁜 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모를 때다. 그럴 때면 초조해진다.
아무튼, 적어도 이렇게 글로 써 두긴 했다. 오늘은 온종일 초조한 채로 지내게 될 것이다. 누군가 이 문제에 이미 이름을 붙여 두지 않았을까 싶어 Wikipedia에서 허무주의, 실존적 허무주의, 실존적 위기, 실존주의, 종교 없는 영성에 관한 항목을 읽다가... 지쳐서 잠들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 어제를 남김없이 누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끔찍한 기분으로 깨어날 것이다.